23_ “와인 드리려구요” 여신과 드디어 만났다. 쪽지에 빼곡하게 적어둔 '대화거리'가 동날 때쯤, 바람돌이 I군에게 전화가 왔다. “나도 간다” 내 인생에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경쟁자로 바람돌이가 등장하였다. 술+담배를 못하니, 새우깡이나 한 대 빨아야겠다.
오후 7시 31분
건대입구역 근방의 F 커피숍에서 약속시간 30분 전부터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에드가 알렌 포우의 단편소설집을 꺼내 읽었다.
(잘못된 표현 정정 : '읽었다' -> '읽는 척했다')
바람돌이 생일날, 여신과 나눴던 짧은 대화들을 풀어내어 오늘의 대화거리를 추렸다.
부담없이 와인을 건네주기 위해,
불면과 와인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와인병을 꺼낼 생각이다.
괜히 생색내는 것처럼 보이면 안되니까, 와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는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감정'을 공유할 생각이다.
물론, 나에겐 '심도깊은 서평'을 공유할 만한 능력이 없다.
혼자 영화를 즐겨본다는 여신이기에,
대학시절 틈만 나면 나홀로 심야영화를 즐긴 얘기로 여신의 환심을 1%라도 살 예정이다.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넘어가면 커피 한 잔 마실 분량은 흘러가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멍때리고 있을무렵,
여신이 커피숍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여신은 머리를 왼쪽으로 발랄하게 묶었고,
브라운 계열의 티와 보다 옅은 색의 가디건을 걸쳤다.
체크무늬 짧은 치마에 분홍리본이 달린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한심한 재채기를 침으로 삼켜내며,
손을 흔들어 내 위치를 알려주었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그렇게 바라던 여신과 인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불면을 얘기하며 와인을 건네고,
화제전환하여 소설과 영화 그리고 뮤지컬과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신은 연극에서 여주인공을 한 경험이 있었고,
홀로 영화를 보듯, 공연도 홀로 다닌다는 귀중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여신을 결코 공연장에 혼자 보내지 않겠어'
라는 쓸데없는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무렵,
바람돌이에게 전화가 왔다.
"뭐해?"
이런 질문에 '응, 야근해,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라는 답변을 날렸어야했다.
"여신이랑 담소를 나누고 있어"
이런, 멍청이.
내 대답에 바람돌이가 골똘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디야? 나도 갈래"
청천벽력 같은 바람돌이의 대답에 아연실색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눈 앞에 있는 여신이 물어봤다.
"바람돌이 오빠예요?"
아니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네'라고 대답해버렸다.
여신이 대답했다.
"아, 네."
여신의 반응은 '아, 네.'가 끝이었다.
안부 전해주세요, 라든가 같이 식사하자고 하세요, 라든가 생일날 반가웠어요 라는 반응이 아니었다.
고무적이었다.
바람돌이는 끊임없이 나의 위치와 오늘의 계획을 캐물으며 오늘의 계획을 망치고 있었다.
여신에게 물어보았다.
"바람돌이가 오고 싶다는데 불러도 상관없어요?"
"네, 상관없어요. 근데 통금이 있어서 곧 가봐야해요."
다행스럽게도 여신에게는 통금이 있다.
바람돌이 따위가 와도 여신은 컴백홈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난 인심쓰는 척 바람돌이에게 말했다.
"나, 건대 F커피숍이야. 얼른 날라와"
이후 30여분 동안 여신과 난 바람돌이 생일날의 한심한 분위기를 추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람돌이는 도착해서 딱 5분 정도 앉아있었다.
과묵한 바람돌이가 여신과 나눈 대화는,
"안녕하세요."
"통금이 있으셨어요?"
"다음에 또 뵈요"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신이 오늘을 추억할 때, 주인공은 나다-
바람돌이는 지나가는 행인 #2로 기억될 것이다.
24_ 여신과 '일촌'이 되었다. 여신의 사진첩을 탐독했다. 사진 속의 남자들이 부럽고 미웠다. 무수한 댓글 속에 바람돌이 I군의 댓글도 있었다. 이런, 발빠른 녀석. 눈에 띄는 댓글을 남기고 싶어 고민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오후 9시 33분
어제 만남의 가장 큰 수확은-
여신과 만나지 않는 순간에도 여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미니홈피 주소를 획득했다는 데에 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말랐던 시절에는, 매일같이 도토리 지름신의 강림을 영접하며 미니홈피에 열정을 쏟아부었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이좋은 친구들'에 대한 내 관심이 많이 꺼져버렸다.
도토리도- 미니홈피도- 기억에서 빛바래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신의 미니홈피를 방문해보니, 미니홈피에 대한 내 정책을 전면수정해야만 했다.
여신에게 '일촌신청'을 하며,
언제 방문할지 모르는 여신을 영접하기 위해 대공사를 시작했다.
번잡한 홈 화면을 깔끔한 블랙톤으로 리뉴얼하고,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던 프로필에는 '한결 덜 쓸데없는 소리'로 수정하였다.
사진첩도 보기쉽게 카테고리를 정리하였고,
동영상/게시판/방명록은 닫아버렸다.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낸 후 '본격적으로' 여신의 미니홈피를 '관찰'하였다.
여신의 사진첩에는 공개된 몇 장의 사진이 있었다.
'저 멀리서 손 흔들고 있는 여신사진'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공원에서 자전거 타며 손 흔드는 여신사진'
'빨간 공중전화 부스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여신사진'
이것만으로도 지구인은 충분히 행복하였다.
오랫만에 몰입하며 사진을 관찰하는데,
요리하는 여신 사진 밑에 충격적인 댓글이 눈에 띄었다.
'바람돌이 : 사진 이쁘게 잘 나왔네'
한 템포 빨리 방문하여 댓글을 남긴 '이럴 때만 빠른' 바람돌이-
순간 질투심과 경쟁의식이 발동한 나는 바람돌이의 한없이 따분한 댓글을 가볍게 농락해주는,
재치가 콸콸 넘치는 댓글을 남겨 여신의 눈에 들고자 한다.
그리고- 난 수시간 보란 듯이 '고민만'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25_ 여신의 싸이를 '훔쳐보니' 여신은 요리+꽃꽂이+자수+피아노+플룻+수영+스키에 능한 인기녀였다. 하지만, 어제 오늘의 나는 훔쳐보기+몰래웃기+썼다지우기+핸폰뒤적이기+혼자상상하기에 완전 능한 찐따남이다. 뭔가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있어 행복하다.
4시간전
여신이 일촌을 '친히' 수락해주셨다.
이제 나도 여신의 일촌이다.
오늘부터 세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여신과 일촌인 지구인과 일촌이 아닌 지구인.
물론 그래봤자 수백의 일촌 중 하나일테지만,
일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사진첩의 봉인이 해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시간을 들여 한장한장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스캐닝'하였다.
사진을 보며, 여신에 대한 정보를 'A4용지'에 기억하기 쉽게 적어놓았다.
여신의 요리실력은 여신의 어머님께서 주신 능력이었다.
여신의 어머님은 음식솜씨 좋으시기로 유명한 주부이신데, 큰 행사에서 주로 장기를 발휘하신다고 한다.
여신에게 꽃꽂이는 취미이지만 관공서에서 발주받은 경험이 있고,
자수는 틈틈히 작품활동을 하여 한 폭짜리를 완성하였다.
피아노는 오래전부터 즐겨서 지금은 '사회봉사'로 피아노연주를 한다.
플룻은 여신의 아버님과 함께 하는 취미생활 중 하나이고,
접영하는 사진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수영실력도 상당해 보인다.
지난 겨울 스키장에서 스키타는 모습을 보니 스타일도 참 착하다.
그렇다. 여신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인기녀였다.
사진마다 깨알같이 가득한 댓글들이 여신의 인기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저- 초라할 뿐이다.
난 요리도 못하고, 꽃꽂이도 못하며, 자수도 못한다. 게다가 인기녀도 아니다. 응?
사실, 어제 오늘의 나는-
여신의 미니홈피만 들락날락거리며 혼자 키득대고 고민하고 기록하고 정리하는 '변태스러운' 찐따남이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근데 계속 이러고 있게 된다.
우왕 축하드린다는 ㅋ